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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로이트 성 김대건 안드레아 한인 가톨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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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아누스의 성 그레고리오


성 대 바실리우스(Basilius, 또는 바실리오)는 부유하고 이름 있는 그리스도교 집안 출신으로, 교회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가문 중의 하나이다. 그의 할머니는 마크리나(Macrina, 1월 14일), 그의 부친은 바실리우스(5월 30일), 그의 모친은 엠멜리아(Emmelia, 5월 30일), 그의 큰 누이는 마크리나(7월 19일), 그리고 두 동생은 니사(Nyssa)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3월 9일)와 세바스테(Sebaste)의 베드로(Petrus, 1월 9일)인데, 모두가 성인품에 오른 분들이다. 


그는 카이사레아(Caesarea),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그리고 아테네(Athenae)의 학교에서 교육받았으며, 이곳에서 나지안주스(Nazianzus)의 그레고리우스와 깊은 우정을 맺었다. 357년경에 그는 동방의 주요 수도원들을 방문하였으며, 358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 네오카이사레아(Neocaesarea)의 이리스(Iris) 강변의 안네시에서 은수자로 정착하였다. 바실리우스는 불과 5년 동안을 그의 공동체와 생활했을 뿐인데도 동방 수도생활의 아버지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는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와는 달리 법 제정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영향은 정교회 수도생활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주요한 원리로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사제로 서품된 후 성 바실리우스는 365년부터 카이사레아 교구를 위하여 일했고, 370년에는 그곳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그는 또 아리우스파(Arianism) 황제인 발렌스(Valens)가 정통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때 용감히 맞서 싸웠다. 이 때문에 그는 지방 총독 앞에 끌려가서 자신을 변명하여야 했다. 바실리우스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하였기 때문에 총독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당신 같은 주교는 일찍이 본적이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대화를 보더라도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으며, 그의 강직성 때문에 교황 성 다마수스(Damasus)와 서방 교회간의 관계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는 병자와 가난한 사람을 구하는데 매우 적극적이었고, 요양원을 짓거나 혹은 대대적으로 진료사업을 펼쳤으며 설교가로도 명성을 얻었다. 그는 아리우스파(Arianism)와의 투쟁을 계속하면서 동방 정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발렌스 황제가 전투에서 사망한 지 불과 한 달 만인 1월 1일 카이사레아에서 사망하였다. 

바실리우스는 초대 교회의 큰 거인이었다. 비잔틴 제국에서 아리우스파를 몰아낸 것이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를 단죄한 배경에는 바실리우스의 영향력이 대단히 컸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가 네오카이사레아에서 제정한 규칙과 조직이 동방 수도생활의 기초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그 전통이 이어져 온다. 또한 바실리우스는 성직매매를 완강히 거절하였으며, 가뭄과 한발의 희생자를 대대적으로 원조하였으며, 보다 훌륭한 성직자 양성을 도모하였고, 엄격한 성직자 법규를 주장하고, 과감하게 악습을 끊어버리면서, 카파도키아(Cappadocia)에서 만연된 매춘행위 관계자들을 파문하였다. 

그는 유식하고 정치력도 있는 사람이면서 성덕이 뛰어났으며, 그리스도교회의 가장 위대한 설교가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그의 해박한 저서들과 4백여 통의 편지들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성령에 관한 저서와 에우노미우스를 반박하는 세 권의 저서 그리고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주스와 함께 편집한 “필로칼리아”가 그 중에서도 유명하다. 그는 교회학자이며 동방 수도자의 아버지로 큰 공경을 받는다.

나지안주스의 주교로 45년간 봉직했던 성 그레고리우스(1월 1일)와 성녀 논나(Nonna, 8월 5일)의 아들로 태어난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나지안주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카파도키아의 카이사레아(Caesarea)에서 공부하던 중에 성 대 바실리우스(Basilius)를 만났고, 그 후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카이사레아 수사학교를 다녔으며, 아테네(Athenae)에서도 10여 년을 성 바실리우스(Basilius)와 미래의 황제 율리아누스 배교자와 함께 공부하였다. 30세 때에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즉시 바실리우스와 함께 이리스 강변에서 은수생활을 하다가 2년 후부터 부친을 돕던 중, 362년에 사제로 서품되고, 372년경에는 사시마의 주교로 임명받았다. 

이 교구는 아리우스(Arius) 지역이었으므로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주교로 축성은 되었으나 부임하지는 못하였다. 발렌스 황제가 죽고 정통교회에 대한 박해가 수그러들게 될 때, 일단의 주교들이 그를 콘스탄티노플로 초청하여 아리우스파(Arianism) 지역에서 정통교회의 활성화를 도모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아나스타시아(Anastasia) 교회에서 설교를 시작하여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이때 그는 아리우스파인 막시무스(Maximus)와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고, 388년에는 새로 입교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의 가르침을 정통교리로 인정하고 아리우스파 지도자를 축출하는 칙서를 발표케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의 임명은 굉장한 파문을 일으켜 381년에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공의회까지 열려 문제가 심상치 않게 발전하므로, 그는 교회 내의 평화를 위하여 주교직을 사임하였다. 그는 엄격한 은수생활을 하다가 고향 땅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정통교회의 수호에 큰 공적을 남겼고, 또 니케아(Nicaea) 공의회의 선언문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동방교회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1월 2일] <굿뉴스>

*아리우스파(Arianism)
아리우스 논쟁의 발단
성경은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입니다.”(요한 10,30)라는 ‘간 큰 소리’를 하시다가 유대인들에게 돌을 맞는 봉변을 당하실 뻔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유인즉 ‘감히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요한 10,30 이하 참조). 아리우스(260-336)를 진원으로 4세기 전체를 뒤흔든 거대한 교리 논쟁의 발단은 사실 예수님을 과연 ‘하느님과 하나’라고 알아들을 것인가, 또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라고 알아들을 것인가 하는 데 있다.

아리우스 주장의 핵심
이제 아리우스는 이른바 ‘오리게네스 좌파’로서, 오리게네스의 사상에 내포된 종속설 - 신성에 있어서 성자는 성부보다 하위에 종속되어 있다고 보는 견해 - 경향을 급진적으로 전개해 나간다. 그는 ‘하느님께서는 태어남도, 시작도 없이 존재하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성자는 탁월하기는 해도 피조물 중 하나지 결코 하느님과 같지 않다는 주장에 도달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께 ‘하느님의 아들’이란 호칭을 쓰는 것도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존재나 지위를 공유한다는 뜻으로가 아니라 단지 은유로서, 그분을 공경하기 위한 일종의 문학적 수사로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구세주는 하느님이 아니고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성자가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는 아리우스 신학의 핵심 상투어가 여기서 나온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더 - 그는 흔히 ‘오리게네스 우파’로 분류된다 - 가 아리우스를 단죄함으로써 시작된 분쟁이 전체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기에 이르자, 일찍이 그리스도교를 통해 제국의 결속을 공고히 하려는 꿈을 다지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사 최초의 보편공의회를 소집하게 되니, 이것이 325년 니케아에서 열린 ‘니케아 공의회’다. 

니케아 공의회의 논박
니케아 공의회는 결정사항을 통해 - 니케아 신경 - 성자는 “성부로부터, 곧 성부의 본질로부터 나신 외아들”로서,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이시며,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같은 본질이시다”라고 고백함으로써 아리우스의 교설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훗날 ‘본질’이란 뜻으로 굳어진 우시아(ousia)란 말마디와 ‘위격’을 뜻하는 히포스타시스(hypostasis)란 말마디가 혼용되던 시절이어서, ‘같은 본질’(ho-moousia)이란 말은 자칫 ‘같은 위격’이란 뜻으로 오용될 소지가 많았다. 이런 저런 이유로 아리우스 이단은 니케아 공의회로 종식되기는커녕, 향후 50년간 그리스도교 세계를 뜨거운 논쟁으로 달구게 된다. 그러는 동안 카파도키아의 위대한 세 교부 - 대(大)바실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 등 뛰어난 신학자들의 도움에 힘입어 용어와 개념이 명확히 정립되고, 마침내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제2차 보편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함께 성령의 신성까지도 명확히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아리우스 논쟁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평가
이제 아리우스 신학의 속내를 좀더 들여다보면서 그것이 지닌 결코 간단하지 않은 의미들을 잠시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아리우스가 하느님의 절대 유일성을 강조하여 그리스도교를 다신론의 위험으로부터 구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신약의 새로움을 모조리 제거해 버리고 사실상 구약의 신관, 곧 단순한 유대이즘으로 회귀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지적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 후에 아타나시우스가 밝혀 주었거니와, 구원론의 수준에서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아리우스 신학은 구원론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 바로 신성을 지니지 못한 구원자, 사람과 똑같기만 한 구원자가 어떻게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구원에 있어서 위로부터의 은총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모방해야 할 대상이나 모범으로 축소되고 만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아리우스의 강박적 유일신론과 사상 전개의 배경에는 헬레니즘 철학 - 신플라톤 철학 - 의 신관이 깔려 있다. 아리우스 오류의 간과할 수 없는 측면 중 하나는 철학적 도식의 기준으로 ‘신비’를 마구 재단하려는 데 있다.

아리우스의 교설은 당대의 단순한 수도승 뿐 아니라 지성인들과 제국의 정치 이데올로기 제공자들에게도 대단한 유혹이었다. 삼위일체 교리 대신 하늘에 오직 한 분의 하느님만 있다는 것만 명확히 하게 된다면, 지상에서 그 유일한 대리자인 황제의 권한에 대해서도 강조하여, 제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타나시우스의 목숨 건 투쟁이 단지 교의논쟁의 수준에만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리우스 논쟁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로 끝난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어느 시대나 계속 진행하는 논쟁이기 때문이다. 특히 상이한 종교 전통과 체험들이 본격적으로 서로 만나고 있는 우리 시대에 이 문제는 민감한 현안이다.

“그러면 그대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겠습니까?”(루카 9,20). 이 질문에 신학자나 교회의 가르침을 듣고 배운 대로 대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분은 제자로 자처하는 우리가 저마다 그분과의 살아있는 관계 속에서 직접 내놓는 한마디를 기다리신다(마태 16, 15 참조). 

교회역사에서 아리우스 이단만큼 그리스도교 자체를 뒤흔들어 놓고, 오랫동안 물의를 일으켰던 이단은 없다. 사실 니케아 공의회가 이 이단 때문에 개최되었으며, 4-5세기의 거의 모든 신학자들이 이 이단논쟁에 관련되어 있다.

아리우스의 생애와 저서
아리우스(256-336)는 리비아 출신으로, 안티오키아에 가서 공부하였기 때문에 루치아누스를 창시자로 여기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그후 알렉산드리아에 와서 사제품을 받고 바우칼리스 본당에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318년부터 그는 성부만이 유일하게 하느님이시며, 따라서 성자는 성부의 피조물이며 성부는 성자를 통해 성령을 창조하였다는 요지로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이같은 잘못된 주장은 교회의 전통 가르침에 근본적으로 위배되는 것이었으나, 그의 설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아리우스는 이러한 주장을 철회하고 정통신앙을 고백하도록 여러 차례 권고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델은 318년에 이집트 지역의 주교회의를 개최하고 100여명의 주교들과 함께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단죄하였다. 그러나 아리우스는 이 결정에 승복하지 않고 오히려 안티오키아의 동료들 중에 동조자들을 규합하여 자기 주장을 계속 펼쳐나갔다. 그의 동조자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은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 주교가 있었는데, 니코메디아는 당시 황제가 거처하는 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에우세비우스 주교의 영향력은 컸다. 아리우스는 자기에게 내려진 단죄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는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에게 보낸 서간]을 318년에 쓴 다음 니코메디아로 피신하였다. 또 320년에는 니코메디아에서 자기 주장을 항변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델에게 보낸 서간]을 썼다. 그리고 자기의 주장을 부르기 쉬운 노래와 시들로 만들어 [향연]이란 이름으로 저술하였다.

아리우스 이단논쟁은 점차 알렉산드리아학파와 안티오키아학파 사이의 대립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종교적인 문제로 인한 지역적인 대립이 제국의 분열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염려한 나머지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에 대한 통일안을 마련하도록 촉구하였다. 교회역사에서 최초로 개최된 니케아 공의회에는 300여명의 주교들이 참석하였으며,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단죄하고 그를 파문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25년에 아리우스를 일리리쿰으로 귀양보냈다가 328년에 풀어주었다. 그러나 아리우스는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콘스탄티누스에게 보낸 서간]을 통해 자신의 신앙의 정통성을 입증하려 하였다. 그는 336년 화해 절차를 밟도록 정해진 전날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결국 파문을 풀지 못하고 죽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모두 하느님이면서 어떻게 한 분의 하느님이 될 수 있느냐 하는 성삼론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알아듣기 가장 어려운 교리인데, 아리우스는 이에 대해 논리적인 설명을 시도하였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성을 지닌 하느님이 되려면 창조되지 않은 분, 나음을 받지 않은 분이어야 한다. 그런데 하느님의 아들이 되신 그리스도는 성부로부터 나음을 받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하느님이 될 수 없다는 설명이다. 그런 이유에서 아리우스의 이론을 따르면 성자 그리스도는 성부의 첫 번째 피조물이며, 다른 피조물들처럼 무에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성자가 나음을 받기 전, 즉 창조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리우스는 그런 이유에서 성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것은 원래 신적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의 공적을 미리 보시고 그를 단지 입양시켰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는 주장이었다. 넷째, 하느님께서 당신 “말씀”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듯이, 성부는 성자를 단지 창조의 도구로 사용하였으며 성자를 통해 창조된 첫 번째 피조물이 성령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아리우스는 난해한 성삼의 관계를 논리적이면서도 매우 알아듣기 쉬운 도식으로 설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은 아리우스의 주장이 사도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인 성자의 신성, 육화와 구원의 신비를 근본적으로 부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주교들은 [니케아 신경]을 제정하고 성자께서 성부와 “동일한 본성” 즉 동일한 천주성을 지니고 계시다고 역설하였다.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우선 화급한 문제인 성자의 천주성에 관한 교리가 선포되었으며, 성령의 신성문제는 후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 : 제2차 공의회)에서 선포되었다. 아리우스의 사후 그의 추종자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약화시켜 성자는 성부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소위 “半아리아누스이단”을 주장하였다. 이 논쟁은 세기를 두고 계속되다가 칼체돈 공의회(451년 : 제4차 공의회)에 가서야 우리가 오늘날 고백하는 삼위일체교리가 확정되었다. [2010년 청주주보] <굿뉴스 자료실>

St. Basil the Great and St. Gregory Nazianzen, Bishops and Doctors

Memorial

“Lamps are made needless by the advent of the sun; and, on the appearance of the truth, the occupation of the Law is gone, and prophecy is hushed into silence. He, on the contrary, who has been empowered to look down into the depth of the meaning of the Law, and, after passing through the obscurity of the letter, as through a veil, to arrive within things unspeakable, is like Moses taking off the veil when he spoke with God. He, too, turns from the letter to the Spirit.”[1]

Sts. Basil the Great and Gregory Nazianzen lived in the latter half of the 4th century. After a respectable Christian upbringing, these men studied in Athens and afterwards began to follow a monastic way of life. As Bishop of Caesarea, St. Basil wrote rules for monks and integrated social programs into monasteries. St. Gregory, Bishop of Constantinople, defended the Church against the Arian conspiracies, clarified the divinity of the Holy Spirit, and presided in the Council of Constantinople. Together, they preached fervently, wrote extensively, and are beloved as the Cappadocian Fathers, along with St. Gregory of Nyssa. [2][3]

Written by Sarah Ciotti
Reviewed by Fr. Hugh Feiss, OSB, STD
[1] Basil the Great, “Proof from Scripture that the Spirit is called Lord,” in De Spiritu Sancto, ed. Philip Schaff and Henry Wace, (T&T Clark, Edinburgh), 33-34, www.ccel.org.
[2] F.L. Cross and E.A. Livingstone,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74), 139-140, 599.
[3] Fr. Hugh Feiss, OSB, The Martyrology of the Monastery of the Ascension, 2008.
<http://divineoffice.org/about-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