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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의 생애(1821∼1846)
 

standrew.jpg최초의 한국인 신부요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천주교 103위 성인 가운데 한사람, 세례명은 안드레아, 아명은 재복, 보명은 지식, 관명은 내선. 본관은 김해 

 

[가문] 
김대건은 1821년 (순조21) 8월21일 충청도 솔뫼 (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재준과 상흥 고씨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몰락 양반의 가문으로, 천주교와 관계를 맺은 것은 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 때였다. 김진후는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된 지 얼마 안 되어 내포의 사도인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하였다.

그는 신해박해(1791) 때 체포되어 관가에서 신앙을 고백한 적이 있고, 1801년 때 유배되었다가 1805년에 다시 해미에서 잡혀 10년 동안 옥고를 치른 끝에 1814년 옥사 순교하였다. 진후의 셋째 아들 종한은 솔뫼에서 안동 우련밭으로 피해 살다가 여기서 1815년 을해박해 때 체포되어 1816년 대구 감영 에서 참수 순교하였다. 그리고 종한의 딸 데레사는 1839년에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 당고개에서 교수되고, 그에 앞서 남편 손연욱(요셉)은 1824년 덕산에서 옥사 하였다, 또 진후의 아우 선후의 손자 제교와 진후의 넷째 아들 희연의 아들인 제항은 1866년 공주에서 순교하였고, 김대건의 숙부 제철의 아들인 진식은 1867년 공주에서, 선식은 해미에서 병인박해 때 순교하였다 그리고 김대건의 아버지 제준은 1839년 서울 서소문에서 참수 순교함으로써, 103위 성인 중 한 사람이 되 었다.

이처럼 김대건의 가계는 순교자들로 일가를 이루었다. 김진후의 둘째 아들인 택현은 솔뫼를 떠나 용인군 이동면 묵 리 한덕동에 정착하였는데, 1827년 정해박해를 피하여 이곳으로 이주한 듯하다. 김대건의 부친 김세준이 세레를 받은 것 은 1836년이었다. 그는 1836년 초 입국하여 서울 정하상의 집에 거주하고 있는 모방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생애]
모방 신부는 1836년 부활절(4월5일)을 전후하여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공소를 순방하던 중 골배마실에 이접한 ‘은이 공소’를 방문하였다. 그는 여기서 김대건을 신학생 후보로 선발하고 세례를 주었다. 김대건에 앞서 두 소년이 신학생으로 선발 되었는데 최양업(토마)은 2월6일에, 최방제는 3월14일에 각각 서울로 올라와 한문과 라틴어 등 외국으로 유학 갈 공부를 하며 수련중에 있었다. 그러나 김대건은 7월11일에서야 이들과 합류하였다.

 



모방신부는 박해 때문에 국내에서는 조선인 성직자 양성교육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신학생들을 파리 외방 전교회 동양 대표부가 있는 마카오에 보내기로 했다. 세 신학생들은 12월 2일 서울을 떠나기 전, 앞으로 공부하게 될 신학교 교장에게 순명할 것과 교구 신부가 되어 열심히 봉사할 것을 서약하였다. 그리고 12월 3일 중국으로 귀환하는 유방제 신부와 정하상, 조신철 등 신자들의 인도를 받으며 변문으로 떠났다. 이 때 조선인 신자들은 변문에서 새로 입국하는 샤스탕 신부를 맞아들여 귀경하였고, 세 신학생들은 샤스탕 신부를 안내한 중국인 안내원들을 따라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남하하여 1837년 6월7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조차지로서, 신앙인들이 극동 진출의 근거지로 삼은 곳이며, 동양 전교 활동의 거점이었다. 출발할 당시에는 세 신학생들이 공부할 장소가 결정되지 않았었다. 이들은 파리 외방전교회가 운영하는 동양인 성직자 양성소인 페낭 신학교에 갈 수도 있었지만, 당시 이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국인 신학생들이 소요를 일으킨 일이 있어서 면학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파리 외방 전교회 신부들은 파리 외방 전교회 동양 대표부에 조선인 신학교를 세워 교육을 맡았다. 세 신학생들은 현지에서 일어난 민란으로 인하여1837년 8월과 1939년 4월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하였다. 그 때마다 신학생들은 그곳에서 몇 개월 동안 공부하다가 마카오로 다시 돌아오곤 하였는데, 이런 와중에 신학생인 최방제가 1838년 11월 27일 열병으로 죽었다. 김대건의 건강 역시 좋은 편은 아니었다. 두 신학생은 1841년 11월 철학 과정을 마치고 신학 과정에 들어갔다. 1842년 아편 전쟁이 끝날 무렵, 두 신학생은 아직 수학 중이었지만, 프랑스 함대의 함장 세실은 마카오 대표부를 방문하여 조선 원정 계획을 알리면서 조선인 신학생 한 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몇 년 째 조선 교회로부터 소식이 끊겨 있었던 터라 대표부 신부들은 이번 일을 하느님이 주신 기회로 여겼다.

 

김대건은 조선 포교를 지망한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2월 15일 에리곤호를 타고 마카오를 출발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1842년 8월29일 남경조약이 체결되자 조선 출동을 중지하고 마닐라로 회항하였다. 그래서 김대건은 하선하여 강남 교구장 베지의 도움을 받아 중국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10월2일 상해를 떠난 그는 10월23일 요동 땅에 도착하여 백가점에 머물면서 3차에 걸쳐 의주 변문을 통한 잠입로를 개척하고자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1843년 4울부터 거처를 소팔가자로 옮겨 최양업과 같이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이 곳에는 1841년부터 페레올 신부가 머물고 있었다.

 

김대건은 1843년 12월 양관에서 있은 제 3대 조선 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성성식에 참석한 후 주교의 지시를 받고 1884년 12월 두만강을 통하여 입국을 시도 했지만 실패하고 소팔가자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해 12월 최양업과 같이 소성의 신학 과정을 마치고 삭발례부터 부제품까지 받았다. 그들은 사제품의 법정 연령인 만24세 미만이므로 사제품을 받지는 못하였다. 김대건은 1845년 1월1일 변문을 무사히 통과하여 1월15일 서울에 도착한 뒤 선교사들을 영입하기 위하여 상해로 도항할 준비를 하고 4월30일 11명의 조선인 선원들과 작은 목선인 라파엘호에 승선하여 제물포를 떠나 6월4일 상해에 도착했다. 그리고 8월 17일 상해 연안에 있는 금가항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그런 다음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8월 30일 상해를 출발 40여일 만인 10월12일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하였다.

김대건의 사목 활동 기간은 짧았다. 그는 입국하던 해 11월 12월 사이에 서울과 경기도 용인의 은이 공소등을 방문했는데, 은이 공소에는 그의 동생 난식과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이 두 달이 조선에서 있은 사목 방문 활동의 전부였다. 그의 교회 활동은 선교사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는 일에서 시작하여 그 사명을 수행하는 일에서 끝났으니, 말년의 지책은 조선 교구 부교구장 이었다. 그는 1846년 5월 14일 주교로부터 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 영입 방도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받고 출범하여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과 접촉하고 편지와 지도를 탁송한 후 순위도로 왔다 . 거기서 6월 5일 관헌들에게 채포되고 10일에는 해수 감영으로 이송 되었다가 다음 날인 6월 21일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김대건은 포청에서 3개월 동안 40차의 문초를 받고, 9월 15일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어 16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때 나이 26세였다. 그의 시체는 모래 사장에 가매장 되었는데 40일 후 이민식(빈첸시오)에 의하여 미리내에 안장되었고, 1901년에는 용산 성직자 묘지로 옮겨졌다가 1951년 그의 두개골을 혜화동 소재 가톨릭 대학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1857년에 가경자, 1925년 7월 5일에 복자로 되었다가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올랐다. 김대건 신부는 25편의 편지를 남겼는데. 한글본 1편 한문본 1편 나머지는 라틴어로 쓰여졌다. 라틴어 편지는 3편으로 비방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마카오 주재 파리 외방 전교회 은사 신부님에게 보낸 편지들로서 조선 입국 통로를 답사할 때의 보고와 옥중 편지이다. 


서두를 “신자들 보아라”로 시작하는 한글 편지는 사형을 앞두고 옥중에서 조선 신자들에게 보낸 회유문이다. 한문 편지는 장문으로 되어 있으며 조선 입국 통로의 개척을 위한 네 번째 답사 여행 후 기록한 것인데 한문 진본은 없고 프랑스 번역본만이 남아 있다. 또한 그는 현재 파리 외방 전교회 고문서고에 소장되어 있는 2동의 라틴어 작문과 <조선 전도>도 작성했다. 이중 작문은 신학생 시절에 작성한 것이고 지도는 선교사의 조선 입국 안내를 위한 일종의 행정 지도로 부제이던 1845년 초 잠시 귀국했을 때 작성한 것이다. 
이 밖에도 교회측 기록에는 김대건 신부가 옥중에 있을 때 정부 당국의 요청으로 세계 지도를 작성하고 지리 개설서를 저술하였다고 하나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사상] 
김대건의 사상을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남긴 편지들과 선교사들의 편지뿐이다. 그 편지들은 자신이 겪고 있던 상황을 보고한 글이어서 사상을 체계적으로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사형장에서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 였고 내 하느님을 위해서 였다. 나는 천주를 위해서 죽는다.”고 말했듯이, 그는 하느님과 한국 교회를 죽기까지 사랑하였다. 


그의 사상에 영향을 끼친 것은 신학교 교육과 그의 마음속에 축적되어 있던 가문의 신앙과 한국 전통 문화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김대건은 당시 조선의 전통 사상, 즉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주의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또 하나의 문명 세계인 서양의 학식을 신앙 실천을 통하여 전파하려 하였다.

그는 세계를 일종의 가부장적 공동체로 인식하여 하느님을 인류의 아버지라 하고 인류를 대가족이라 말하면서 모든 인류가 형제와 같이 결합되어 친구처럼 지내는 사해동포주의를 열망하였다. 그러나 그의 세계 인식은 중국과 조선을 사대 관계로 파악하고 조선을 중국의 종속국으로 인정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는 옥중에서 임박한 죽음을 의식하며 마카오에 있는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에서 선교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즉 중국의 황제가 조선 왕에게 프랑스 선교사들을 살해하지 못하게 하고, 한국인 신자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도록 명령한다면 해결될 것으로 믿고, 이 일은 중국 주재 프랑스 공사가 중국 황제에게 협조를 요청하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중국에서 는 1844년 중국과 프랑스간에 체결과 황포 조약에 따라 중국 황제가 선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중국인 신자들을 처형하지 않는다는 칙령을 발표했는데, 이러한 성공은 프랑스의 종교 보호 정책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김대건은 선교열에 불타고 있었다. 그래서 천주교를 박해하고 프랑스 선교사의 입국을 금지하며 처형하는 조선의 쇄국 정책을 야만적 행위라고까지 비난하였다. 그는 외부의 지원이 없이는 선교에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프랑스의 종교 보호 정책이 중국의 속국인 한국에서도 실현되기를 기대했으며, 선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은 정당한 것으로 여기고 무력으로 체결한 황포 조약이 한국에서도 적용되기를 희망하였던 것이다. 


그는 프랑스에 호의를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극한 상황에 처해 있는 한국 교회를 구출하고 신앙의 자유를 성취하려는 일념과 민족 구원을 우선적으로 앞세운 나머지, 프랑스 정부의 외교적 노력을 기대한 것이다. 김대건이 지녔던 사상의 중핵은 효애였다.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부터 신자들이 공통적으로 소유해 온 전통적 신심의 바탕은 ‘대군대부’ 사상이었다. 그들은 하느님을 인류의 대왕이며 공동의 아버지로 믿었다. 이와 같은 신앙의 분위기에서 성장하여 왔던 김대건의 의식 바탕에는 전통적 신심이 잠재되어 있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공경한 신심은 한국인이 최고의 가치 덕목이며 윤리의 근본으로 삼아 왔던 효와 깊이 결합되어 있었다. 효의 근본 정신은 귀중한 생명을 준 생명의 근원이며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준 부모에 대한 보은 행위이다. 따라서 효도가 인간의 당연한 도리인 반면에 불효는 인간의 가장 큰 죄였으므로 효도하지 않으면 자식도 사람도 아니었다. 효는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며 아버지의 권한은 절대 군주적이었다. 자녀는 아버지에게 최대의 경애를 드리고 절대적으로 순명해야 하며, 아버지의 뜻을 정성으로 받들고 덕행을 실천하여야 했다. 그리고 떳떳한 사람으로 살아 명예를 빛내서 부모에게 영광을 돌려 드려야 했다. 그러나 효는 공경하고 사랑하는 정으로 결합할 때 참다운 의미가 있다. 


이처럼 김대건은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형벌을 당하고 있다고 했으며, 신자들에게 효애를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순교를 통하여 모범을 보임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효애심을 철저하게 실천하였다.

김대건은 하느님을 '임자’라고 표현하였다. 인류를 대가족으로 표현하였듯이 하느님을 대가족의 가장인 임자로 여겼다. 그는 가정에서 권위를 행사하고 가족을 사랑으로 돌보는 지상의 아버지에 대한 경험으로 하느님을 이해한 것이다. 아버지는 자녀의 소유주이고 생사 여탈권을 가진 임자이다. 따라서 아버지는 존경과 위엄의 대상일 뿐 아니라 복종과 사랑의 대상이었고, 사람으로서 이러한 임자를 잊고 몰라본다면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가 없는 쓸모 없는 인간이라 하였다. 비록 하느님을 위해 세례를 받음으로써 세상에 비할 데 없이 귀한 제자라는 이름을 받았더라도 성화(聖化)되고 의화(義化)되지 않는다면 세례 받은 의미가 없다 하였다. 더구나 죄에 죽고 하느님을 위해 살려는 생활을 포기하여 배은 망덕한다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만 못하므로, 배교는 보본과 보은을 저버리는 행위이자 큰 죄악이며, 하느님은 국가의 임금 위에 있는 지상 절대권자일 뿐 아니라 당신을 공경하도록 명령하므로 배반할 수 없다 하였다. 그는 하느님께 충실히 복종하며 순교한 것이다.

그의 효애 정신과 임자께 대한 순종은 교계질서에 대한 이해와 실천에서도 드러난다. 즉, 그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주교와 신부들의 죽음을 임자인 하느님께 대한 순정의 태도로 여겼고, 자신도 그러한 모범을 실천으로 옮겼다. 그래서 선교사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라는 주교의 명령에 항상 주저함이 없었을 뿐 아니라 죽기까지 실천하였다. 

그는 하느님께 대한 효애 정신을 강조하며 살았듯이 부모께 대한 효성 또한 지극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남편 김제준이 순교한 후 유랑하는 신세나 진배없었고, 그래서 그는 순교하기 전 주교에게 자기 어머니를 보살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김대건의 부모에 대한 효도는 바로 하느님께 대한 효도의 시작이었다. 조선 사회는 신분 제도에 의하여 유지되어 왔다. 이러한 조선 사회에 한국 천주교회는 교리를 통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을 가르쳤고 신자들은 실제 생활에서 교리의 가르침을 향유했었다. 그러나 신분제적 의식을 완전히 탈피하거나 사회 체제를 변혁시키지 못하였듯이 김대건 역시 전통 사회의 관념을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는 순위도에서 체포될 때, 그리고 해주 감영에서 문초 당할 때 자신의 신분이 양반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자신의 편지 말미에는 자기 이름 앞에 본관을 반드시 적을 정도로 한국의 전통 의식에 젖어 있던 한국인이었다.

김대건의 영성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박해 시대 신자들의 영성과 동일하였다. 그의 하느님에 대한 인식은 유교적인 효의 개념에다가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신앙이 혼합되어 있다. 그가 아버지라고 부른 하느님은 창조주, 상선벌악을 결정하는 심판관, 모든 귄위의 절대자, 온갖 환난에서 보호해 주고 힘을 주는 분, 은총으로 섭리하는 분이었다. 또한 하느님을 군주제에 비유하여 임금 위에 있는 절대자로서 당신을 공경하도록 명령할 뿐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도록 애덕의 의무를 함께 명령하는 분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신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에서 하느님의 자녀 된 증거로 이웃을 사랑하도록 간곡히 유언하였다. 그의 의식을 지배한 것은 미래 지향적인 종말론으로 천당과 지옥, 그리고 사후 심판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이 세상은 인간이 항구히 거처할 곳이 아니고 사람은 잠깐 땅 위를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현세를 나그네의 여인숙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가 지향하는 세계는 영복을 누릴 천당이고, 현세는 천당을 준비하는 곳이지만 현세의 선행에 따라 사후 천당이 결정되었다. 그래서 생전의 선행은 사후의 노자라고 말했다. 현재와 내세, 천당과 지옥은 긴장과 대립의 관계였다. 김대건은 현세를 천국을 얻기 위한 영혼의 전투장, 사형 집행장을 영혼이 재적해야 할 최후의 격전장으로 보았다. 그래서 천국을 얻으려면 마음을 허실하게 먹지 말고 주야로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아 영혼의 삼구와 투쟁하여 박해를 극복하라고 하였다. 그는 박해를 영혼의 위기로 보았고, 하느님을 공경하고 영혼을 구하는 일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서 신자들을 전투장의 군사로 표현하였다. 신자들은 하느님의 주권 아래 사는 사람답게 박해에 굴복하여 사주 구령을 포기하지 말고, 하느님의 착실한 군사와 의자가 된 신분을 증거 해야만 하였다.

그는 신자 공동체를 악의 세력에 대항하여 무기를 갖추고 전쟁터에 있는 전투적 공동체, 즉 신전지 교회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의식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를 대장으로 표현하며, 이미 만물이 그리스도께 굴복되었듯이 신자들도 예수의 편에 서서 악의 세력과 용감히 싸워 승리하라고 독려하였다. 그러나 악의 세력에 대항하여 승리할 수 있는 무기는 그리스도였다. 악의 세력과싸우는‘신전지 교회’의 모습은 사도 바오로의 옥중 서간인 에페소서 6장 10-20절을 연상케 한다.

김대건이 표현한 순교자의 영광은 개선 교회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그는 순교자들이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용맹하게 전투를 벌여 승리를 얻은 후, 붉은 옷을 두르고 면류관을 쓰고, 천상 성도로 개선가를 부르며 들어갔을 것으로 말하면서 피악수선을 성인. 성녀들의 발자취로 표현하였다. 


박해 시대의 작품인 <사향가>의 가사 중에서는 전투적 공동체의 모습을 모방한 내용이 노래 불려지고 있다. 김대건의 순교 정신은 효애 정신으로도 충분히 설명된다. 그러나 그는 순교를 그리스도의 순교와 연결지어 말하고 있다. 그는 순교를 하느님께 순종한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하나의 덕행으로 말하였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순종하며 자신을 완전히 봉헌하고 맡겨진 목자로서 사명에 충성을 다하는 증거로 자유로이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한국에서 선교하다가 순교한 선교사들의 원형으로 말하고, 순교를 사목자의 사명을 수행하는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리스도가 당신 양들을 위하여 자의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였듯이 사목자라면 양들을 위하여 자의적으로 최고의 청원인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의식하고, 자기의 죽음을 목자로서의 사명과 불가분의 일로 여겼다. 


김대건은 그리스도께 자기를 전적으로 내맡기며 그리스도의 승리와 은총을 굳게 믿었다. 그는 옥중에서 말하기를, 자신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결박 당해 있으며, 그리스도의 승리와 은총을 굳게 믿는다 하였다. 김대건은 교회의 시작을 그리스도의 순교로부터 말하였다. 그리스도가 무수한 수난을 받고 순교로써 교회를 세웠듯이 교회도 당연히 수난을 겪으면서 자랄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신자들에게 상기시키면서 한국 교회가 겪고 있는 박해를 당연한 것으로 말하였다. 그러면서 시련을 견디는 충실한 신자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한 몸 같이 형제애를 나누며, 낙담하지 말고 자시 자신에게 충실하며, 마음을 견고하게 다지고 박해에 임하도록 권고하였다. 그러면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희망도 강하였다. 그는 배를 타고 항해일 때나 대륙을 여행할 때나 급하고 어려움을 당하면 성모께 깊이 의탁하고 보호를 청하였다. 그러나 성모께 갖는 희망은 ‘하느님 다음’임 밝혔다.

김대건은 한국 천주교회 설립 후 한국 교회의 희원을 이룬 첫 사제였다. 그의 인물됨에 대하여 당시의 조선 교구장이던 페레올 주교는 “영렬한 신앙심, 솔직하고 신실한 신심, 놀랄 만큼 유창한 말씨는 한 번에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그에게 얻어 주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그는 서양 학문을 직접 수학하고 체득한 지식인답게 세계 조류에 대해 폭 넓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세계 정세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의 문호를 개방하고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민족과 국가 발전에 유익한 일임을 역설한 선각자였다. 

그는 하느님에게 사로잡힌 사람 답게 죽음을 목전에 둔 극한 상황에서도 천주교의 진리를 설파했고, 하느님과 교회, 교회의 장상과 동료들, 그리고 신자들을 깊은 애정으로 사랑하였다. 그는 사목자로서의 사명을 충실하게 실천하다가 죽음으로 자신을 완전하게 봉헌하였다.

출처 : 한국 가톨릭 대사전(성 바오로 수도회 웹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