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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로이트 성 김대건 안드레아 한인 가톨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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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피셔, 주교, 순교자


1469년 영국 요크셔(Yorkshire)의 베벌리(Beverly)에서 어느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난 성 요한 피셔(Joannes Fisher)는 1483년 케임브리지의 성 미카엘 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그의 재능이 매우 뛰어나서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자랐다. 그래서 그는 1491년 불과 22세의 나이로 특별 관면을 받은 후 사제로 서품되었다. 1497년 그는 국왕의 모친인 마가렛 보퍼드(Margaret Beaufort)의 고해신부로 활약하는 한편, 그녀를 설득하여 케임브리지에 그리스도 신학교를 설립하고 1505년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1504년 케임브리지 성 미카엘 신학교의 총장이 된 그는 같은 해에 로체스터의 주교가 되었다.

그런데 헨리 7세와 헨리 8세의 혼란한 정치 풍토 속에서 헨리 8세 왕이 교황으로부터 영국 교회를 분리하고 수장령을 반포했을 때 그는 용감하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그리스도의 법을 계속하여 따르겠습니다.” 친구와 적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양심을 끝까지 지켰다.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글도 남아 있다. “나는 다른 어떤 사람의 양심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결국 그는 1534년 4월 고령에도 불구하고 수장령에 대한 서약을 거부하고 성 토마스 모어(Thomas More, 6월 22일)와 함께 반역 죄인으로 런던 탑에 감금되었다.

한편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I)가 성 요한 피셔 주교를 구하기 위해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으나, 오히려 헨리 8세의 분노를 사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결국 그는 1535년 6월 22일 마지막으로 '테 데움'(Te Deum)을 노래하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1886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35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6월 22일] <굿뉴스>

성 토마스 모어, 인본주의자, 순교자

법률학자이자 판사이던 요한 모어(Joannes More)의 아들로 런던에서 태어난 성 토마스 모어는 12세 때에 캔터베리(Canterbury)의 대주교인 요한 모턴의 조수생활을 하다가 옥스퍼드로 가서 링컨 법학원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1501년 법조계에 진출했다. 1504년에 그는 영국 의회에 진출했으며 카르투지오 회원이 되려는 꿈을 포기하고 1505년에 제인 콜트(Jane Colt)와 결혼하였다. 

그들의 집은 영국의 문예부흥 및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 이유는 당대의 석학들과 지성인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였기 때문이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기지는 만인의 감탄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영국 인본주의자들의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최고 석학이었다. 그는 시, 역사를 비롯하여 프로테스탄트를 반대하는 논문, 신심 서적과 기도문 등을 저술했고 고전 번역 작업도 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유토피아”(1515-1516년)는 이성이 지배하는 이상적인 국가상을 묘사한 것으로 세계의 고전이 되었다. 또 “루터를 배격하는 헨리의 변명”(1523년)은 그가 가르쳤던 헨리 8세에 대한 강력한 옹호가 담긴 서적이다. 

1510년 그는 런던의 주 장관대리가 되었고, 1511년에는 아내와 사별한 뒤에 과부이던 엘리스 미들턴(Alice Middleton)과 재혼하였다. 헨리가 그의 형 아서(Arthur)의 사망으로 왕으로 등극하면서부터 그는 프랑스와 플랑드르(Flandre)의 외교사절로 활약했고, 1517년에는 추밀원에 진출했으며, 1521년에는 기사작위를 받았다. 또한 그는 1523년에 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529년에는 월시(Walsh) 추기경 후임으로 재상이 되었다. 모어는 이때 왕의 이혼에 대하여 강력한 어조로 반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상으로 기용된 것이었다. 

그 후 그는 헨리 8세 왕의 이혼 문제에 침묵을 지킴으로써 왕의 혼란을 가중시킴과 아울러 분노케 하다가, 헨리 8세가 카타리나(Catharina of Aragun) 왕비와의 이혼 허가를 교황청에 제출하는 서류에 서명하기를 거부했을 때 국왕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또 교회를 반격하는 일련의 서류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한 후 모어는 재상직을 사임하고, 1532년에 첼시(Chelsea)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또한 그는 헨리 8세가 카타리나의 시녀였던 앤 불린(Anne Boleyn)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에게 후계 지위를 양도한다는 소위 왕위 계승 문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왕에게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534년에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혔고, 15개월 동안 옥중 생활을 하는 중에도 영국 교회에 대한 왕의 수장령에 서명할 것을 요청하는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에게 침묵권을 행사하며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 일로부터 꼭 5일 째 되는 날인 7월 6일, 마침내 그는 참수형을 받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국왕의 충실한 종이 될 수 있으나 먼저 하느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던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1935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고, 법률가의 수호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리고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정치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6월 22일] <굿뉴스>


Saints John Fisher, Bishop, and Thomas More, Martyrs

Optional Memorials

St. Thomas More was born in 1478 in London and as a young boy was placed in the service of the Archbishop of Canterbury. At the age of fourteen, he went to study at Oxford, but after two years his father had him move to study law in London. He was attracted by the new humanism. His religious faith led him to practice asceticism and to study with two prestigious communities: the Observant Franciscans and the London Charterhouse. He married, fathered children, and was elected to Parliament under King Henry VII. Because of his upright moral character, prestigious learning and sharp mind; he was made Lord Chancellor shortly before Henry VIII decided to take control of the Church of England. St. Thomas More resigned over this and consequently suffered poverty, imprisonment in the Tower of London, and beheading. Thomas More, along with 53 others, including St. John Fisher, Cambridge scholar and Bishop of Rochester, were beatified by Pope Leo XIII in 1886. More and Fisher were canonized in 1935. [1]

Written by Sarah Ciotti
Reviewed by Fr. Hugh Feiss, OSB, STD
 [1] John Paul II, E sancti Thomae Mori – Apostolic Letter in the form of a Motu Proprio, October 31, 2000.
<http://divineoffice.org/about-0622 >